-
출근이 하고싶다. 일이 하고싶다. 새로운 물건들도 많은데. 여행에서 얻은 에너지를 방사하고 싶다. 그런데 코로나다. 아프고 조급하다. 코로나가 나아질 쯤 이제 일할 수 있다 하고 신이 났는데 후유증으로 후각과 미각을 잃으면서 극심한 무기력증이 찾아왔다. 후유증은 고통을 넘어서서 그냥 텅 빈 것 같았다. 나의 존재 자체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았고 손으로 흐트리면 사라지는 연기같았다. 아니 연기도 없었다 그냥 아무 것도 없었다. 그래서 한창 아팠을 때는 내 안의 넘쳐나는 에너지를 육체가 방산하지 못하게 해서 고통스러웠으며 몸이 나았을 때는 드디어 일할 수 있게 되었는데 호르몬적으로 무기력해져서 큰일이었다.
요즘 이렇게 끈적하고 느린 곡이 좋더라
그래도 뭔가 무기력증이 생기기 전이라서 와인도 마시고 즐거운 격리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모든게 0이 되어버린 사람.
그 어떤 것도 하기 어려웠다. 심지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들도 재미가 없고 그저 아무런 것도 하고싶지 않았다. 잠드는 것조차도 .. 모든 것이 일종의 마비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어떤 사건이나 이야기들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다행스럽게도 책을 읽거나 영상을 보는데에는 무리가 없었다. 그 중 영상보다 책을 읽을 때 그냥 무념무상이 되어서 그런지 잘읽혔다. 여행을 하고 나서 종은이와 데이트를 하기로 약속되어있었고 이번 휴무일에 함께했다. 어차피 서울에서 일도 해야해서 먼저 서울로 가서 일을 해결한 후 우리는 경복궁역에서 만났다.여전히 후각 미각은 잃은 상태였지만 희한하게 맛있고 맛없는 것 정도는 느껴진다. 여기 커피는 정말 맛있었다 햇살도 좋고 종은이도 좋고
여행에서 돌아와서 한국은 너무 춥게만 느껴졌다. 나이가 들어갈 수록 여름이 좋아진다. 다른 계절도 좋긴 하다. 그런데 추운 그 느낌이 춥다. 추우면 옷을 많이 껴입어야하는 나는 외출이 신나지 않는다. 어쨌든 추워서 더 무기력해졌었는데 이날 이후로 가을 날씨를 즐길 수 있게 됐다.
그냥 걷고 걸었다. 이미 맛있는 커피와 가을 햇살 듬뿍받아 기분이 좋아지고 있는 나였다. 사실 우리는 덕수궁에 가기로 했는데 가다가 멋진 풍경이 많아서 멈추고 들를 수 밖에 없었다. 이 계절 온 몸으로 누려야해.
참고로 여기 공원이라 벤치도 있음
가을의 덕수궁과 서촌은 정말 아름다웠다. 아름다움을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친구가 있어서 감사하다. 우리는 여기서 조금 더 걸어서 다소 러프한 이자카야에 가기로 했다. 나는 여기가 가히 충격적이다. 너무 좋다.
정말 놀라운 건물 지하에 위치한 이자카야. 이자카야는 다 좁고 어두워야한다는 편견을 부셔버렸다. 여긴 일반 식당처럼 넓고 식탁마다 인덕션이 있으며 전부 유창하게 일본어를 쓰는 직원들이 있다. 키친은 또 쿨하게 오픈 키친이고 주인 아주머니는 호탕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맛난 메뉴 가득하고 음식 맛이... 여긴 일하러 갈 때 혼자서 꼭 들려야지. 이때도 맛을 못느꼈는데도 그걸 넘어서서 맛있는 건 알았다. 그리고 이 날 이후부터 내 후각과 미각이 점점 돌아오기 시작했다. 종은이도 우연히 알게된 곳인데 좋아하는 사람들만 데려오고 있다고 한다. 왠지 나도 그러고 싶은 곳이다. 나만 알거나 진짜 좋아하는 사람들만 데려가고싶다.
이 날 하루는 모두 다 맞아 떨어졌다. 우선 전철에서 읽을 책을 고르는데 <클링조어의 마지막 여름>을 골랐고 책 내용은 내 눈을 반짝이게 만들었다. 열정적이고 재빨리 소진되는 생명을 가진 여름처럼 타오르는 열정을 가진 클링조어의 이야기로 시작됐는데 삶에 대해 회의감을 갖고 있던 나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다가 잠이 들어서 자고 나니 금방 도착하여서 물건을 사는데 내가 필요하던 물건이 마침 남아있었고 종로로 이동해서 일을 본 뒤 시간 맞춰 약속한 장소로 출발하려고 하는데 종은이에게서 연락이 왔다. 생각보다 차가 많이 밀려서 15분정도 늦을 것 같다고. 그리하여 혼자서도 할 일이 많은 나는 종은이에게 나도 천천히 갈게 걱정말고 천천히 오라고 한 뒤 정말로 천천히 가게되는데. 하필이면 종은이보다 늦을 뻔 했다. 왜냐하면 종로에서 전철을 탔는데 종은이도 그 전철에 타고 있었다. 그니까 둘 다 늦은 셈이다. 결국 경복궁역에서 약속한 장소까지 걸어갔고, 일하던 오전은 바람이 불어 쌀쌀했는데 종은이를 만나고 나니 바람이 그쳐 따스해졌다. 그래서 더욱 햇빛이 반짝이게 느껴졌나보다. 역시나 사람들도 날이 좋은 것은 귀신 같이 알아가지고 카페에는 자리가 가득 찼는데 우리는 그냥 날이 좋아서 바깥에 앉아있었다. 그냥 그림자들, 햇빛, 나무, 사람들, 건물 보면서 이야기만 해도 우리는 충분했다. 바깥에서 그냥 마시고 싶을 정도였으나 잔에 마시고 싶어서 기다렸다. 자리가 났고 커피도 정말 맛있었다. 사장님이 커피에 진심이시다. 디저트 없는 카페 최고. 그리고 걷는데 아름다운 장면들이 쏟아졌다. 기분이 좋았다. 지나가다 사먹은 붕어빵이랑 국화빵도 맛있었고 덕수궁은 더할나위없이 아름다웠다. 그리고 발견이었던 이자카야와 귀가까지. 만난 사람은 종은이다. > 이것 자체가 사랑. 아무튼 그 날 이후로 기력이 돌고 기분이 좋다.
무기력에서 유기력으로 끝나는 이번 글.